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 학교, 사회로부터 우리의 속내, 민낯은 다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커가면서 나의 민낯을,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지요. 따라서 우리의 대인관계는 항상 형식적이고, 피상적이 되기 쉽습니다. 만나서 뭔가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고 웃고 얘기하고 헤어지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우리는 여전히 허전하기만 합니다. 누군가와 만나서 뭔가에 대해 아무리 많은 얘기를 해도 마음 한 켠의 허전함과 외로움은 사라지질 않죠.
그런 감정들에 대한 우리의 대처 방식은 문제를 더 깊어지게 만듭니다. 허전함과 외로운 감정이 들면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그런 감정을 지워버리려고 애쓰거나 아니면 사람자체를 회피하고는 인터넷 같은 사물과 만나며 그런 감정을 자위하려 노력하게 됩니다.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주저 에티카는 우리말로 윤리학이란 뜻입니다. 이때 스피노자가 사용한 윤리의 개념은 통상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존의 도덕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윤리란 우리가 옳고 그름에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 도덕의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에 따라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만남을 추구해서 더 우리 자신을 성장, 확장시켜야 한다는 뜻의 의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기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그래서 도덕에 의한 당위와 강박의 윤리학이 아니라 기쁨의 윤리학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기쁜 만남을 하면 할수록 우리 정신 속에 적합한 관념이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고 봤습니다. 이런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입장에서 당위와 도덕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윤리는 슬픔을 야기하는 부적합한 관념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슬픔에만 빠지게 만드는 정치사회체제는 극복의 대상이였구요.
기쁜 만남은 우리가 우리의 민낯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때 생겨납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나야 하는 관계는 슬픔과 피곤함을 줄 뿐이지요. 우리에게는 그런 슬픔의 관계를 정리하고 멀리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대상을 찾아가 나의 감정을 드러내고 만날 힘도 갖고 있어야 하겠죠.
대인관계의 문제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주되어 나타날 테지만 결국 핵심은 위와같은 우리의 민낯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그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 타인과 진정한 참만남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생각합니다.